희랍어 시간, 한강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기억만으로 선득한 그 감갓을 잇사이로 누르며 그녀는 쓴다. 얼음 기둥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단어."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섬뜩한 차가움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당신은 삶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고, 당연하게도 자립적으로 살아갈 힘이 그때에는 전혀 없었으며, 위태했던 출생의 과정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당신은 훌륭히 자랐으며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고. 목소리를 크게 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공간을 점유하고 어깨를 곧게 펴라고. 그 논리를 따라가면 그녀의 남은 삶은 하나의 투쟁,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의심하는 가냘픈 내적 질문에 한 발 한 발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했다. 그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의 어딘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여전히 그녀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고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억누르며 지내왔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象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 ... 장미. 수박을 반으로 가르면 활짝 꽃처럼 펼쳐지는 붉은 속. 연등회 날 밤. 눈송이들. 옛 여자의 얼굴.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댓글